오랜만에 작품성 좋은 영화를 봤다. 바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챌린저스(Challengers). 구아다니노 감독의 전작에서 콜미 바이 유어 네임, 본즈 앤 올을 재밌게 봤었는데 영화 챌린저스도 못지 않게 흥미진진했다.
요즘 들어 콘텐츠가 가지는 '작품성'에 회의가 많이 들었다. 미디어의 대세가 호흡이 긴 영화나 드라마에서 숏폼 콘텐츠로 옮겨지다 보니 작품의 퀄리티 보다는 작품의 조회수가 중요해진 세상이다.
바야흐로 숏폼의 시대다. 이 시대에 콘텐츠가 '작품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당위성'이 있는가? 누구나 영화 감독, 작가, 철학자가 될 수 있는 세상에서, 중요한 건 작품이 가지는 예술성, 통찰력 보다는 '조회수'인 세상에서, '작품성'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예술성과 작품성이 더 이상 권위로도, 자본으로도 이어지지 못하는 세상인데 말이다. 그런 트렌스 속에서 스스로 생각했던 콘텐츠의 '작품성'이라는 개념도 많이 흔들리고 모호해졌다.
그런 나의 회의 어린 질문의 답을 구아다니노 감독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정말 오랜만에 러닝 타임이 긴 영화를 '몰입'하면서 봤기 때문에. 숏폼 시대인 만큼 나는 내가 집중력이 많이 짧아져 콘텐츠를 보는 끈기가 떨어진 줄 알았는데,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 작품을 보니 원인은 내가 아니라 요즘 나오는 콘텐츠였던 게 아닐까 싶다 '-' 어쩌면 애초에 집중력 장애는 없었을 수도. 몰입도 떨어지는 퀄리티 낮은 콘텐츠만 접하다 보니 자연스레 재미가 없어 잘 안보게 되고, 그러다 결국 내가 나의 집중력을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
근데 뭐, 내가 백날 콘텐츠의 질이 떨어진다, 예술성이 어떻다, 작품성이 어떻다 떠들어봤자 뭐가 바뀌나 '-' 심지어 나는 평론가도 아닌데 말이다. 무튼 오랜만에 영화의 고전성(?) 라떼 영화의 재미를 구아다니노 감독의 작품을 통해 만끽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요즘 애들은 이런 긴 영화도 흥미를 느낄라나.. 이러니 진짜 좀 옛날 사람이 된 거 같다.... 어쩌나...
줄거리 및 느낀점(스포주의)
영화의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아트'와 '패트릭'은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베프인데, 둘 다 테니스 프로 선수를 지망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함께 출전한 테니스 대회에서 둘 다 여성 주니어계의 천재라 불리우는 '타시'에게 반하고 만다. 테니스 실력이면 테니스 실력, 섹시함이면 섹시함, 뭐 하나 빠지지 않는 '타시'의 눈에 들기 위해 베프인 '아트'와 '패트릭' 사이엔 묘한 긴장감, 경쟁심이 흐르기 시작하는데... 타시는 한 술 더 떠 테니스 대회에서 이기는 사람이 자신의 번호를 가져갈 수 있다고 둘을 자극한다.
그렇게 번호를 가져가게 된 건 '패트릭'쪽이었고, 아트는 질투를 느끼지만 승부에 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패트릭은 주니어 시절을 보낸 후 바로 프로의 세계로 나가게 되고, 아트와 타시는 같은 대학교에 지망해 대학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 과정에서 타시는 선수 생활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되고, 이후 패트릭과 감정의 골도 깊어지면서 자연스레 둘은 헤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타시의 곁을 지켜주던 아트는 그녀의 마음을 얻게 되고, 타시는 아트의 코치이자 연인이 된다.
세월은 흐르게 되고, 10대 어린 시절에 만났던 셋은 어느새 30대 어른이 되어 있다. 타시와 아트는 부부가 되어 이쁜 딸을 낳았고, 부상 이후 타시는 더 이상 선수 생활을 지속하지 않은 채 패트릭의 코치로만 머문다. 아트도 한 때는 승승장구 했지만 이후 슬럼프에 빠져 챌린저급의 대회에 겨우 진출하는 정도로 선수의 명성을 유지한다. 패트릭 역시 가난하고 초라한 삶을 살며, 테니스쪽으로 기량을 펼치지 못하고 하루하루 나이들어 갈 뿐이다.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 소위 '청춘'을 의미하는 사자성어다. 패트릭, 아트, 타시는 서로가 가장 빛이 나던 화양연화의 시기를 함께 보낸 사이다. 그러나 인생의 굴곡 속에서 각자의 빛은 퇴색되었고, 노쇠해진 얼굴로 셋은 다시 테니스 코트 위에서 재회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함께 보냈던 그들은 많이 변했지만, 그 와중에 변하지 않는 것도 있으니 그게 바로 셋의 관계성이다. 타시는 여전히 아트와 패트릭을 경쟁시켜 둘의 최고 기량을 뽑아내려 하고, 아트는 마치 타시의 아들마냥 패트릭과의 경기에 졌을 때 타시가 본인을 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해 한다. 패트릭 역시 타시 곁을 맴돌며 가장 친한 친구였던 아트의 아내를 유혹한다. 본인의 코치가 되어 본인과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지 않겠냐, 여전히 너는 나에게 끌리지 않냐며.
철이 없다면 철이 없고, 치정극이라면 치정극이고, 막장이라면 막장인 셋의 관계성은 영화 내내 무척 흥미롭다. 왜냐면 막장이긴 해도 서로가 서로의 삶에선 없어서는 안될 자극제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나를 가장 고통스럽고 아프게 하는 이가, 동시에 내가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이기도 하기에. 뭐랄까. '관계'가 가지는 참 오묘한 지점을 감독은 너무나도 잘 건드리고 있다. 타시가 주니어 시절, 멋진 경기를 끝내고 아트와 패트릭에게 테니스란 결국 '관계'라는 것을 강조했던 그 씬이 남긴 여운처럼.
경기의 결과를 감독은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근데 뭐랄까, 영화가 끝나고 나면 명확히 제시되지 않은 그 테니스 경기의 결과를 알아버린 거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느낌이 이야기해주는 건 결국 중요한 건 테니스 경기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타시가 말한, 그들의 '관계', 경기 내내 그들 사이에 흐르는 역동 관계가 이 영화의 포인트다.
사랑일까? 욕망일까? 아니면 둘은 같은 걸까? 서로 충돌하고, 서로를 버리면서, 서로의 자극제가 되어주는 셋의 인연은 참 묘하다. 마지막에 아트와 패트릭이 마치 예전에 주니어 시절처럼 치열하게 경쟁하고, 서로를 껴안는 장면은 엄청난 쾌감을 선사한다. 거기다 주니어 시절, 상대를 굴복시키고 야성적이게 소리를 지르던 타시는 그때 느꼈던 전율을 그들의 경기를 보며 다시 느낀 듯 야성 넘치는 비명을 지르며 영화는 끝이 난다.
가히 최고의 엔딩이다. 엔딩만 따지면 좀 오버해서 근 10년 간 본 영화 중에 최고다. 셋은 그 경기에서 주니어 시절 본인들의 테니스에 대한 열정을 다시 재현해낸다. 그리고 그 열정은 오로지 셋이 함께 있을 때만 가능한 결과다. 서로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결국 서로의 최고의 동기부여가 되어주는 그들의 우정인지 사랑인지 둘 다 인지 모를 그 관계성이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가장 말하고 싶은 바가 아닐까?
경쟁, 욕망.
그리고 그 감정 사이에 스며드는 보여질 듯 말듯 한 서로에 대한 사랑까지. 완전히 새하얀 것도, 완전히 검은 것도 재미없다. 실타래처럼 엮여 있는 욕망과 사랑을 아름답고 뛰어난 연출로 그려내는 구아다니노 감독은 과연 천재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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