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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니체의 위버멘시, 역사관, 그리고 계보학적 태도의 의미 (1)

by India 2021.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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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위버멘시 개념

 

위버멘시는 소극적 염세주의가 빠지는 허무주의를 극복한다. 니힐리즘(일체의 사물이나 현상은 존재하지 아니하고 인식되지도 아니하며 또한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아니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적 태도)을 적극적으로 받아드리고,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자세를 가진다. 이는 최상의 인간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한다. 위버멘시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 무의미성, 무근거성, 니힐리즘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하며 그 위에서 삶을 긍정하는 태도로 창조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부정을 극복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더 나아가 새로운 유형의 인간, 창조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 세상은 원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허무주의에 빠져 허우덕 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가 삶의 의미를 창조해 나갈 것인가? 삶의 기준, 삶의 의미, 삶에 어떤 이야기를 입히느냐, 그것은 오로지 당신 자신에게 달렸다. 그리고 이는 남들과 경쟁해서 이기는 우월한 인간이 되는 길이 아니다. 오직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는 길이다.

 

니체의 역사관

 

초역사적인 태도는 동일성의 원리로 각각 역사적 관점과 맥락을 삭제하여 보편성을 획득하는 관점이다. 하나의 초월적인 의미가 존재한다고 믿는 관점이며, 이에 반하여 계보학적 태도가 있다. 계보학적 태도는 어떤 힘에의 의지가 만들어내는 투쟁 중에서 발생하는 우연적 역사에 주목한다.

 

니체에게 있어서 역사라는 것은 '삶'이라는 준거점을 기준으로 그 유용성을 획득한다. 인간은 망각하는 능력과 기억하는 능력을 삶에 유용하도록 조형하여야 한다. 역사는 각각 기념비적 역사, 골동품적 역사, 비판적 역사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기념비적 역사는 과거의 위대함을 기억하는 일이다. 위대한 일이 인류의 과거에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념비적 역사는 과거를 신비화시키고 과거와 현재를 동일시하며, 무모함과 광신의 위험으로 빠질 결함을 가진다. 무엇보다 과거의 위대함을 찬양하면서 현재의 위대함을 왜소시킬 우려가 있다. 골동품적 역사는 과거를 보존하고 존경하는 의미의 관점으로, 나의 뿌리에 대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해석을 유도한다.

 

이는 나에 대한 이해와 뿌리에 대한 이해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과도할 경우 곰팡이 냄새가 나듯, 보존할 수는 있으나 현재의 삶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게 살지 못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비판적인 역사는 과거를 심판대 위에 세운다. 과거를 적극적으로 해체하고 파괴하며, 그것이 가지는 오류를 검토하며 과거를 망각하는 것 조차 파괴하는 역사적 태도다.

 

역사의 과잉은 인간의 삶을 왜소하게 만들어 창조적 본능을 삭제한다. 역사의 과잉은 인간의 내면은 비대하지만 행동은 왜소하게 하며,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어 현재를 잊게 만들며(노년주의) 객관성에 매진하게 하고 미래에 대한 지향성, 방향성을 잃게 만든다. 이에 인간은 냉소주의에 젖게 된다. 이러한 왜소함에 대한 약으로 비역사적 태도와 초역사적 태도라는 약간의 독이 필요하다. 비역사적 태도는 '망각'으로 자기 정체성이 없고, 고정된 것이 없는 관점을 말한다. 초역사적 태도는 어떠한 동일성의 원리를 찾아내는 능력이다. 인간은 역사의 과잉에 매몰되지 않기 위하여 이 두 태도를 유용하게 조형할 줄 알아야한다.

 

니체가 계보학적으로 묻고자 하는 것

 

1) 선악의 기원

 

니체는 계보학을 통해서 어떤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역사적 관점을 거부한다. 니체에게 역사란 힘에의 투쟁에서 발생한 우연적 산물이다. 이 우연적 산물이 어떠한 배경에서 형성 되었는지를 살피고, 따라서 지금 존재하는 가치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작업을 한다. 가치에 대한 가치를 묻는 것, 절대적이고 원래 그랬던 것은 없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먼저 니체는 인간의 본능적인 것, 이익을 가져온다고 현재 믿어지는 '선'의 가치에 대해서 묻는다. 자기를 희생하고, 부정하고, 남을 배려하고, 내세우지 않는 겸손함과 근면함. 하지만 이는 노예도덕이다. 적극적인 대응이 아닌 반작용이며, 스스로가 긍정하는 존재론적 윤리에서 탄생한 '선'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 작용을 일으키는, 직면할 수 있는 힘이 없어서 회피하는 방식의 '선'인 것이다. '선'의 본래적 기원은 우월한 것, 좋은 것, 그 자체로 긍정적이고 힘을 갖고 있는 것이며 '악'은 평범하고 비속하고 열등한 것을 뜻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윤리가 초월적 내세에 승리를 돌리게 되면서 이 '선'은 악이 되고, '악'은 선으로 교차되어 자리잡게 된다. 여기서 노예도덕은 타인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내세우며 앞에서 작용하는 힘으로 해결하지 못한 원한을 도덕적 체계 안에서 보복하는 정신적 승리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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